총성이 멎는 것만 평화일까…세계 여성들이 말한 ‘평화의 조건’

2026.07.21

전쟁이 멈추고 총성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세계 여성 지도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분쟁 이후에도 여성과 청년이 안전하지 않고, 정신적 상처가 남아 있으며, 여성의 목소리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된다면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모였다.

전쟁과 재무장, 난민과 이주, 성폭력과 청소년 문제, 정신건강, 경제적 불평등, 교육과 허위정보까지 각 지역이 직면한 문제는 달랐다. 하지만 현장에서 갈등을 경험하는 여성들이 직접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세계여성평화그룹(IWPG)은 7월 20일부터 이틀간 온라인으로 ‘글로벌 여성평화포럼’을 개최했다. 아시아·태평양, 아프리카·유럽, 미주, 남아시아·중동 등 4개 지역에서 1067명의 여성이 참여해 지역별 안보 현안과 여성의 평화 구축 참여를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해법 등을 논의했다.

이번 포럼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2026 세계여성평화 콘퍼런스’의 사전 논의 성격으로 마련됐다. 4개 지역에서 나온 제안은 ‘글로벌 여성평화 권고안 2026’으로 통합돼 9월 콘퍼런스에서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제시될 예정이다.

유럽-“전쟁을 정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유럽 세션에서는 재무장과 전쟁의 일상화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다.

카르멘 마가욘(Carmen Magallón) 스페인 여성국제평화자유연맹(WILPF) 명예회장은 ‘여성, 재무장과 전쟁의 정상화에 도전하다’를 주제로 발표하며 전 세계적인 군비 경쟁이 전쟁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가욘 명예회장은 전쟁을 자연현상이 아닌 인간의 선택으로 규정하며 전쟁의 정상화를 막기 위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넴 아리칸(Sanem Arikan)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행정서비스부장은 문화와 예술을 통한 평화문화 조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아리칸 부장은 문화와 예술이 대화와 상호 이해,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의 논의는 전쟁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예방하고 갈등을 완화하는 과정에서 문화와 예술, 사회적 신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접근도 함께 제시됐다.

평화의 기반으로는 교육과 경제적 자립, 이주민 공동체의 소속감이 꼽혔다.

야나 메룬코바(Jana Merunková) 체코 사회적기업 유어찬스(yourchance o.p.s.) 창립자 겸 CEO는 교육과 기업가정신, 경제적 독립이 여성과 청년의 역량을 높이고 사회적 통합을 강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빅토리아 도누(Victoria Donu) Moldoveni.cz 창립자는 이주민 공동체의 신뢰와 소속감을 높이는 지역사회 구축 활동을 소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이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느끼는 데서 평화가 시작되고, 공동체가 신뢰를 쌓을 때 평화가 성장한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전쟁이 끝나도 평화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세션에서는 분쟁 이후 여성과 청년이 겪는 현실과 지역사회 회복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모니카 케케 와네(Monica Keke Wanneh) 카메룬 CANAAN-RUTAWA 협동조합 매니저는 2016년부터 이어진 카메룬 북서부 앵글로폰 위기가 여성에게 미친 성별화된 영향을 분석했다. 와네 매니저는 여성의 참여가 단순한 대표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강조했다.

우멘조 바니아 안둠베니(Umenjoh Vania Andoumbeni) 카메룬 성·장애 문제 증진협회(APGDI) 창립자 겸 회장은 ‘전쟁의 부재를 넘어 평화의 도전이 여성의 역량 강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다. 그는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여성의 안전과 역량 강화, 의사결정 참여가 함께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켕 줄리엣 치(Keng Juliet Chi) 카메룬 장로교회 평화사무국 프로젝트 매니저는 북서부 바멘다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긴급한 문제로 청소년의 약물 남용과 원치 않는 임신을 꼽았다. 그는 정부와 학교, 가정, 의료기관, 종교단체, 지역사회가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케냐에서는 레지나 무티루 멘드와(Regina Mutiru Mwendwa) 케냐 국가통합·응집위원회(NCIC) 평화·젠더 전문가가 분쟁 이후 회복 과정에서 정신건강과 심리사회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순히 치안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분쟁을 경험한 여성의 회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취지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라벨로손 치우르손 로바하니트라 이다(Raveloson Tchiourson Rovahanitra Ida) 사회정의를 위한 마다가스카르 연합(CO.JUSTI.S.) 국가의장이 여성의 지역사회 리더십이 국가 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주-침묵했던 여성의 목소리가 평화를 바꾼다

미주 지역에서는 여성의 목소리를 제도와 정책으로 연결하는 방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피스 우도카 애니라(Peace Udoka Anyira) 캐나다 글로벌 임팩트 임파워먼트 허브(Global Impact Empowerment Hub) 창립자는 오랫동안 침묵해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평화를 재정의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츠하할라 토레스 피멘텔(Mitzhajalla Torres Pimentel) 멕시코 Colectiva Lila 심리학자는 정신건강을 갈등 예방과 회복을 위한 핵심 요소로 제시했다. 정신건강을 돌보는 것이 평화의 문화를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아나 에리카 산타나 곤살레스(Ana Erika Santana González) 멕시코 연방 하원의원은 여성의 법적 평등이 실질적인 경제적 독립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가 사회정의를 넘어 장기적인 번영과 지속 가능한 평화를 위한 전략적 투자라는 주장이다.

벨키스 플로렌티나 이스키에르도 토레스(Belkis Florentina Izquierdo Torres) 콜롬비아 특별평화관할법원(JEP) 판사는 영토 차원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도기적 정의 과정에 민족·젠더·여성·가족·세대 관점을 함께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브라질에서는 신시아 데 카르발류 브룸(Cinthia de Carvalho Brum) Instituto MovRio 여성 신고센터(Disque Denúncia Mulher) 매니저가 여성 안전을 평화 구축의 출발점으로 제시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인권 문제일 뿐 아니라 지속 가능한 평화를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볼리비아에서는 레티시아 로드리게스 세라테(Leticia Rodríguez Serrate) Mamayatech 비즈니스 인텔리전스 분석가가 여성의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 참여 확대가 혁신과 포용, 지역사회의 회복력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아시아·태평양-평화는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만들어진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평화를 군사적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캐럴 쇼(Carole Shaw) International Access Networks 이사 겸 UN 아시아·태평양 여성감시기구(APWW) 최고경영자는 인권의 관점에서 평화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갈등이 발생한 뒤 협상하는 것뿐 아니라 폭력이 고조되기 전의 선택이 평화를 만든다는 설명이다.

멜라니 람비노(Melanie Lambino) 필리핀 전국여성클럽연맹(National Federation of Women’s Clubs) 이사는 여성을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구조적 장벽을 지적하며 평화에는 평등과 정의, 안전,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프가니스탄 난민 출신인 무즈간 타헤리(Mujgan Tahery) 유나이팅 서클 다문화 커뮤니티 센터 창립자 겸 CEO는 난민과 이주 여성도 평화 구축의 지도자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주와 필리핀 참가자들은 젠더 기반 폭력과 청소년 폭력을 주요 문제로 꼽았으며, 난민·다문화 여성 관련 논의에서는 사회적 소속감을 평화의 핵심 요소로 제시했다. 아체 지역에서는 여성에게 재난 대비와 대응 과정의 예산 및 의사결정 권한을 실질적으로 부여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또 소셜미디어를 통한 허위정보 확산이 민주주의와 공동체의 신뢰를 훼손한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 간 협력과 평화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남아시아·중동-“여성이 없는 평화는 지속될 수 없다”

남아시아·중동 지역에서는 여성의 정치적 참여와 정의가 평화의 조건으로 강조됐다.

가다 크레임 아타(Ghada Chreim Ata) 레바논 전 난민부 장관은 여성들이 전쟁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평화협상에서 배제되고 있다며 제도적으로 여성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우지아 쿠피(Fawzia Koofi) Women for Afghanistan(WFA) 이사회 의장은 여성의 참여가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여성들이 국가안보와 경제정책, 평화 프로세스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미아 알-에랴니(Lamia Al-Eryani) 예멘 Peace School Organization 대표는 국가적 화해를 위해 사회적·경제적·심리적 갈등의 뿌리를 해결해야 하며 여성은 국가 회복의 핵심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다 알카타위(Huda Alkhatawy) 이라크 평화·여성권리 옹호가는 사회적 분열과 실업, 허위정보, 젠더 기반 폭력을 주요 문제로 지적하며 대화와 여성 역량 강화를 촉구했다.

헤바 하이다르(Heba Haidar) Global Shapers Aden Hub 창립자는 여성들이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지역사회 변화를 이끄는 주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르단에서는 아미라 알 자말(Amira Al Jamal) Supreme Council of Our Step Association 창립자 겸 의장이 심리사회적 장애가 있는 여성 역시 평화 구축 과정의 완전한 참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신건강 역시 정의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파키스탄의 교육 멘토 바툴 카즈미(Batool Kazmi)는 젠더 불평등이 표면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장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제도와 사회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키프로스의 마리아 하지파블루(Maria Hajipavlou) 키프로스대 명예교수는 평화협상에 젠더 관점을 반영하는 다층적 접근과 인권안보, 젠더 감수성 있는 미디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시작된 평화의 이야기

4개 지역에서 나온 이야기는 서로 달랐다.

유럽에서는 재무장과 전쟁의 일상화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카메룬에서는 분쟁이 여성과 청년의 삶에 남긴 상처와 지역사회의 회복이 논의됐다. 미주에서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건강, 법과 정책의 변화가 평화의 조건으로 제시됐다.

아시아·태평양에서는 난민과 이주민의 소속감, 재난을 견디는 지역사회의 힘, 허위정보가 무너뜨리는 사회적 신뢰가 문제로 떠올랐다. 남아시아와 중동에서는 전쟁과 갈등의 당사자이면서도 평화협상과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에서 배제돼 온 여성들의 현실이 소개됐다.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말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이 말한 평화의 범위는 전쟁의 현장을 넘어 일상의 영역까지 확장됐다.

누군가는 전쟁이 남긴 정신적 상처를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학교와 가정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말했다. 누군가는 일할 기회를, 누군가는 자신의 의견을 결정 과정에 반영할 권리를 이야기했다. 또 누군가는 난민으로 살아가며 느낀 ‘소속될 곳이 있다는 것’의 의미를 말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서 온 목소리도 있었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갈등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차별과 폭력, 배제와 불신이 평화를 위협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평화라는 말이 거창한 국제정치의 언어에서 내려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의 문제로 이어진 셈이다.

이번 포럼에서 나온 제안들은 ‘글로벌 여성평화 권고안 2026’으로 정리돼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여성평화 콘퍼런스에서 국제사회에 제시될 예정이다.

평화는 누군가 대신 정의해주는 하나의 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평화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말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오는 9월 대한민국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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